할머니의 반지

2009.08.27 16:27:20

4341186547.jpg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나를 붙잡은 뒤
그녀는 방에서 낡은 사진 한장을 가져와 내 앞에 펼쳤다.

"거 몰라?, 탈랜트 누구 부인말이야, 내 옆에 서 있는..."

그 사진보다 그녀의 손톱에 칠해져 있는 고운 빛의 메니큐어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남편을 묻고
삼년만 참으며 살자 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들어 왔다는 곳.
거기 사십 년을 살면서 가난에 애쓰느라 분주했던 손끝에 고운 색.


유년시절
내 할머니의 손가락엔 손톱보다 큰 알을 가진 반지가 늘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
밭에서 늦게 돌아와 손을 씻고
곱게 앉으셔서 반지를 닦으시던 할머니.
그 정갈하고 정성스런 의식 그것은
하루종일 풀을 뽑고 흙을 나르고 씨앗들을 거두느라 분주했던 손에 주는 선물 같은 것.

희미한 백열 전구 아래 성경책을 읽으시다가
간혹 그 푸른 빛 영롱한 보석을 들여다보시며 젊음의 한 시절을 떠올려보는 것.
거기서부터 홀 몸으로 아주 멀리 왔어도
여기 나와 함께 오래 빛나는 것 하나 있다는 위안.
그것은 길고 남루했던 세월에 대하여
할머니 스스로 당신께 드리던 선물 같은 것.

그리고 할아버지 생각.


훗날 그 반지를 내가 갖게 되었지만
할머니 손가락을 떠난 그것은 내 손위에서 그저 탁하게 변색된 인공 보석이었을 뿐이었다.

그 빛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사실 그때 그 보석 속에서 찬란하던 빛은 할머니에게서 왔던 것.
보석이 빛났던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을 잘 붙들고 견디신 할머니가 온몸으로 빛나고 계셨던 것이다.
그걸 반지가 창문처럼 조용히 내뿜고 있었던 것.


사진을 찍고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려고 할 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살아 있다면, 막내 손자가 지금쯤 학생 같았을 것.

아, 그래요? 잘 생겼었나보죠, 농담 건네고 정 끊으며 돌아설 때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 와서
한 걸음 씩 내딜 때 이유 없이 쏟아져 들어 오던 눈물이 있었다.

나중에 요긴하게 쓰려고

내가  내 안 쪽으로 채워넣은 그 눈물.

그리고 어제
할머니를 생각하며 조금 덜어 낸 그 눈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6 시인의 뒷모습 imagefile 지구멀미 2010-06-07
15 웃는 소녀 imagefile 지구멀미 2010-05-24
14 뒷모습 imagefile 지구멀미 2009-11-08
13 노무현 imagefile 지구멀미 2009-11-08
12 울진 죽변항 imagefile [2] 지구멀미 2009-10-19
11 쓸쓸한 날의 풍선 imagefile 지구멀미 2009-10-14
10 나주 영산포 imagefile [1] 지구멀미 2009-10-11
9 경전선 imagefile 지구멀미 2009-10-09
8 청량리 청과 시장 imagefile 지구멀미 2009-10-06
7 두 정거장의 손님 imagefile 지구멀미 2009-09-18
6 만났다는 것이 이미 축복 imagefile 지구멀미 2009-09-16
5 제주-함덕 imagefile 지구멀미 2009-09-13
» 할머니의 반지 imagefile 지구멀미 2009-08-27
3 빨래 imagefile 지구멀미 2009-08-27
2 꽃있던 자리 imagefile 지구멀미 2009-08-27
1 저녁 일곱 시 삼십 분의 1인분 imagefile [1] 지구멀미 2009-08-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