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랑에게

2009.08.27 14:07:10

 

지금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속에서 완성된 그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간절히 부르면 당신이 당신의 삶을 버리고 내게 올까하여 저는 당신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삶을 위하여, 내 그리움은 오래 침묵에 묶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편하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들은 소식으로는 당신은 현재의 삶 속에서 무척 즐겁고, 저를 잊은 지 오래이며, 이제 내가 간절히 부른다고 하여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을 편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침묵의 끈을 풀어낸 뒤, 그대 보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날을 가장 선명히 기억합니다. 당신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내가 멈추지 못해 앓던 그때. 그런 저를 처연히 여긴 당신이 제게 저녁의 약속을 헌사해 준 그 날 말입니다. 

생의 목련에 꽃들이 너무 환하여 우리가 눈감고 지나가야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집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리 내 울던 그 음식점 말입니다. 당신은 당황하여 울고 있는 저를 바라보다가 그럼, 아주 조금만, 그러나 한시적으로 저를 허락하여주신다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이 그 남자와 만나다 지치면 그 공백 동안에 우리는 만나서 들과 산으로
푸른 식물을 맞이하러 갔었고 어떤 날엔 저자거리의 번잡함 속에서 손 붙들고 내리는 황혼을 기꺼이 맞아들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그 남자와 사이의 긴 문장 중간에 찍힌 쉼표 같은 짧은 순간들이었습니다. 짧아도 좋았습니다. 시간의 길이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신도 저를 만나면 우리 둘만이 세상에 있는 듯 제 앞에서 꽃처럼 환히 웃어주었습니다. 

하룻동안 피어나고 오랜 후에야 다시 볼 수 있던 그 얼굴꽃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어느날 당신은 혼잣말처럼 숨 내쉬며 말했습니다. 나와 만나는 것이 좋아져서 두렵다고. 마음이 흔들려서 이러다 꺾일까 걱정된다고.
그 말을 들은 저는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 고뇌의 저녁들은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날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꽃진 목련 그늘 아래 무릎 꿇고 베드로처럼 당신을 세 번 부정하던 그 저녁 말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싫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싫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 속으로 맹세하고 그 맹세를 제 목숨 위에 문신처럼 새겨 넣으며 했던 그 거짓말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저를 때리지도 않고, 당신은 저를 밟지도 않고 그저 제 슬픔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시었습니다.

선희.

시간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 안에 있던 사랑은 지금 제게 어떤 흔적과 흉터를 주었습니까.

한번 사는 것이고 그러나 여러번 사랑하는 것이어서 생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한번 살고 한번만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셨다면, 혹은 여러 번 살고 그러나 단 한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셨다면.

저는 당신께 생에 관하여 확신에 찬 문장을 써 드렸을 것입니다. 세월과 사랑과 그 어떤 것들에 관하여서도
곱게, 격양되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 내게 늘 그립고 미웠던 당신.

아직 인천에 살고 계시는지요. 끊어야 겠다던 담배는 아직도 피우시나요. 늘 아카시아 껌만 씹으시는지요. 커피에 설탕은 넣지 않으시겠지요. 그날의 당신처럼, 지금도 여전히.



(2002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 지나간 사랑에게 2009-08-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