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라이카

2009.08.27 13:13:42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도 종이었다.
고약하기로 소문난 주인댁에서 돌아와 어린 아들 곁에 앉을 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이,
다만 아버지의 소원이셨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모두들 기념사진 촬영에 바쁠 때 카메라가 없던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난감해하셨다.
아들의 졸업은 오래 기념해주고 싶으셨던 것.
이웃에 몇번 부탁하여 사진을 한장 찍어달라고 하셨다.
가슴팍에 들고 찍을 꽃도 빌리셨다.


7472538930.jpg

[초등학교 졸업사진]

 

 

지금도 앨범을 찾아보면 그때의 사진이 있다. 어색한 표정으로 그곳에 나는 서 있고 자세히 보면 내 시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그 옆에 죄송한 듯 서 있는 내 아버지를 향해 있다.

작은 아버지를 월남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논을 팔아 돈을 주셨다.
그곳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던 어린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 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어떤 세월과 치환되어 생겨난 것인지 울며 떼쓰던 동생은 알지 못했다.

군대에 가지 않게 된 작은 아버지는 뒷돈 쓰고 남은 돈으로 카메라를 하나 사셨다고 한다.
그때 땀흘려 일하시는 아버지를 찍은 사진이 아직 몇장 있다.
사진 속 아버지의 표정에 웃음이 있다.
그러나 그건 슬픔의 맨살 위에 겹쳐 입은 웃음이라는 외투.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볼 때
착시처럼 거기 슬픔의 문양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친구의 엄마를 보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아니, 세상엔 피아노를 치는 엄마도 있구나.

어머니는 학교에서 조금 비켜선 시장 골목에서 옥수수와 나물을 파셨다.
나는 그것이, 그 가난의 자백이 너무 창피했으므로
수업이 끝나면 그 골목에서 가장 먼길을 택해 집으로 가곤 했었다.
굳이 시장쪽으로 가자고 하는 친구들을 먼저 보낸 뒤 멀리서 어머니의 등을 보다가 돌아 온 저녁.
그것 팔아서 몇푼이나 버느냐 소리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지금도 가끔 그 외침이 다시 내게 돌아와서 나를 찌른다.
어린 아들의 철없는 외침을 잔잔한 어깨로 듣고 계시던 어머니의 눈빛도 자꾸 되돌아 온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되돌아 온 내 자신의 목소리에 몰매 맞는다.
그건 이제 때리면서, 나를 살리는 매다.


가끔 장롱에서 아버지가 쓰던 카메라가 나왔다는 말을 듣는다.
내 아버지께서도 취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일이 없을 때 카메라를 들고 산과 들을 다니며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땐 가족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때였다.

아무리 장롱을 뒤져도 뻔하다. 그곳엔 묵은 이불 뿐이다.
한낮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피곤하여 덮고 잠들던 그 이불 뿐이다.
아버지의 마르고 뾰족한 몸과 오래 닿아서 낡은 그 이불.
그것외 아무것도 없는 곳.
그러나 마음의 팔을 뻗어 뒤적일 때 거기 손끝에 아리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버지는 장롱 속에 라이카 대신 땀흘린 청춘을 넣어두신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야위고 주름진 뺨과
쌀을 씻지 못하던 저녁, 부억에서 울던 어머니의 흐느낌과
굳은 살과 풀물로 가득한, 잉여없던 청춘의 긴 세월을 거기 모두 넣어 두신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라이카 대신 아버지의 청춘을 꺼낸다. 거기 名器처럼 빛나는, 세월이 지날 수록 그 가치가 더해지는 아버지의 청춘이 있다.
손으로 만지면 체온이고 눈으로 바라보면 빛이고 가슴에 대어보면 쿵쾅거리는 아버지의 긴 청춘이 거기 있다.
나는 가만히 그것에게 마음의 무게를 기대어본다.
내 마음은 귀한 것과 만나 부드러워지고 그러나 어느 한 쪽은 움켜쥔 듯 아리고 슬프게 주름진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장롱 속에 무언가를 넣어 둘 때다.
아버지는 어느 날 묵은 이불을 꺼내시다가 어린 자식이 넣어 둔 그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걸 보시고 다소 놀라 웃으시다가 가난해서 더 길었던 당신의 청춘이 마음을 눌러 눈이 젖으시고
가난했으나 얻은 것들이 더 많았구나, 내 청춘의 빛은 오랜 뒤에 비로소 켜지는 불빛같구나, 그런 마음으로 다시 눈이 젖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때이다.
아버지의 장롱 속에 내가 무언가를 넣어둘 때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어리고 어리석은 나는 알지 못한다.


(2003년에 처음쓰고 2008년에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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