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자 가을이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무언가 휩쓸려 들어올 때, 버텨주던 둑이 일순 무너져 드디어는 마른 이쪽에 콸콸, 무섭게 물이 들이닥치는 모습처럼,
창문을 열고 서 있는데 가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천천히 방안을 서성이며, 생각도 없이, 하루를 내 자신에게 공급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뒤돌아 보거나 하는 일도 없이 천천히 부억쪽으로 걷다가 다시 돌아와 침대에 앉아보고.
하루를 한가지 일만 하고 보낼 수는 없을까, 온통 하나에 집중하거나 풀어진채로 소비하고, 소비당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였다.
영화를 보는 하루라고 정해지면 그 날은 영화만을 보았다. 아침 일찍 첫상영의 영화를 보고 나와 바로 그 다음 영화관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종일 영화에만 하루를 지불했다. 저녁 늦게까지 보면 6편 까지 볼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영화들이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하루. 영화와 영화가 삶 속으로 스며와서 삶과 영화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고 오후 늦게 쯤엔 영화와 영화 와의 경계마저도 낮아져서,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 하루를 한가지에 보내고 그것에만 몸을 적시는 것. 겉돌던 감정들이 내면 깊숙이 들어오는 숙성의 시간들.
강물을 바라보는 하루도 있었으며 눈을 감고 음악만을 듣는 하루, 땅에 등을 대고 누워있는 하루, 노래만을 부르는 하루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머리를 염색할까" 하는 생각이 뜬금 없이 찾아온 거 말고는 마음의 큰 동요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저 손 적시며 그릇 몇개를 닦았고 조용히 맨발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1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돌아온 일 뿐이었다. 맨발에 와 닿는 그 바닥재의 적당한 차가움과 누군가 내 맨발을 볼까 두려운 감정 들 속에서 잠시 1층에 내려갔다 돌아온 일.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책은 읽지 않고 그러나 책꽂이에 가득한 책의 제목들은 하나씩 발음해 보았다. 전날의 섬...옆집 여자...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96년을 대표하는 문제詩...박상륭 깊이 읽기...팍팍 튀는 일본어 회화 첫걸음...그러다가 우연히 책과 책 사이에 꽂혀 있는 옛필름을 발견하고는 고개 올려 그걸 형광등에 오래 비춰보기도 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간단히 점심은 차려 먹었고 오후엔 창을 열고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수동카메라의 셧터를 찰칵찰칵 몇번 눌러 보았다.
그리고 이제 저녁이 왔다. 하루종일 뭐 딱히 한 것이 없으므로 숨은 조금 더 잔잔해진 듯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목의 움직임도 부드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 생산해 내지 않고 소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주어진 몇개를 사용하다가 깨끗이 끝내는 것.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따로 어떤 생산이 필요치 않았던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생의 출석부에 이름도 올리지 않고 그 어떤 이에게서도 호명 당하지 않고 오늘처럼 그저 몇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서 있을 수는 없을까.
그게 아니라면 한 생동안 한가지 일만 할 수는 없을까. 흙위에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일만 할 수는 없을까. 버섯의 행태에만, 원자의 구조에만, 노래에만, 그림에만, 산책에만, 그렇게 한가지 일만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누군가 내 삶을 물어오면 그저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버섯의 형태만 연구했습니다 라고.
곧 서른이다. 생각이 많아진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고 말았다.
(200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