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고 눈이 내렸다

2009.08.27 15:16:50

 

밤이 오고 눈이 내렸다
술을 마시고 나온 일행은 잠시 세상을 잊고 눈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사람을 뛰게 하고
눈은 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멈춰선 우리들의 어깨에 몇송이의 눈이 가볍게 스쳤다
하늘에 가득한 순백의 궤적
그 최초 발원지를 생각해보았다
젖은 구름 밭에서 불현듯 피어올랐을 저 꽃잎들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이 그냥 꽃잎 자체로 피어났다가
개화의 순간 이미 낙화를 시작하는 것

당신과의 사랑도 그랬었다
아무런 배경없이 사랑은 생겨났고 그 발화의 순간
이미 우리는 긴 퇴로를 그리며 소멸하게될 사랑을 예감했었다

어찌 우리의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보편적인 사랑들도 결국 그렇게 끝이나는 것
개화의 순간 이미 낙화를 시작하는 것

눈이 내렸다
몇개의 눈은 와서 내 뺨에 닿고
그 순간 눈물처럼 번졌다
여기까지 와서 스러지기 위해 지나왔을 눈의 오랜 비행

당신과 내가 만나기위해 서로가 지나온 긴 여정을 생각한다
그러나 닿는 순간 우리는
이 눈처럼 그냥 소멸했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소멸하지 못한 탓에
이렇게 쓸쓸히 이어지는 상실 뒤의 궤적

되돌아갈 교통편을 걱정하며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움직이면서 걸었다
나도 별 수 없으므로 길을 걸었다
걸을 때 비로소 눈은 그치고
어깨에 쌓인 눈이 그저 한동안 나와 동행하며 걷다가 사라졌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73 새는 몸에서 날개를 꺼낸 [1] 지구멀미 2010-06-12
72 찔레꽃 담 아래 지구멀미 2010-05-31
71 단음이면서 가장 긴 음 [2] 지구멀미 2010-02-01
70 석 줌의 쌀 지구멀미 2010-01-28
69 검정 비닐 봉지 [2] 지구멀미 2009-12-03
68 같은 날 출렁이는 사랑의 원액 지구멀미 2009-10-19
67 너는 껍질이 없고 깨물어도 지구멀미 2009-10-10
66 계단에 관한 명상 지구멀미 2009-09-29
65 이 봄에 그러하는 것 지구멀미 2009-09-14
64 한식 지구멀미 2009-09-13
63 할머니는 무릎이 아파 조금 늦게 지구멀미 2009-09-13
62 그리움 지구멀미 2009-09-13
61 앵두 앞의 기도 지구멀미 2009-08-27
60 세상에 꽃이라는 말보다 늘 지구멀미 2009-08-27
59 꽃들이 늘 손해보며 지구멀미 2009-08-27
58 바람 처럼 휑한 내 요즘 지구멀미 2009-08-27
57 악수처럼 짧은 꽃 지구멀미 2009-08-27
56 서계동을 서개동으로 지구멀미 2009-08-27
55 간혹 목이 메일 때 지구멀미 2009-08-27
54 봄을 향하여 한잎 한잎 지구멀미 2009-08-27
53 옛 살던 집을 찾아 행촌동 골목을 지구멀미 2009-08-27
52 내 흉터로 네 흉터를 지우는 일 지구멀미 2009-08-27
51 그러니까 비의 이름은 구름 지구멀미 2009-08-27
50 그냥 노랑, 그냥 붉음 지구멀미 2009-08-27
49 그래서 나는 남자이고 당신은 여자인 것 지구멀미 2009-08-27
48 당신과 나의 나무 지구멀미 2009-08-27
47 다랑쉬 오름 지구멀미 2009-08-27
46 바람은 비를 비쪽으로 지구멀미 2009-08-27
45 이가 네개 쯤 보이게 지구멀미 2009-08-27
44 나는 내일 몸을 가지고 너에게로 지구멀미 2009-08-27
43 그냥 물어보니까 대답한다는 수준에서 이히이힝 지구멀미 2009-08-27
42 천천히 걸으면 이마에 그것이 지구멀미 2009-08-27
41 모르는 여자로부터 시작된 노래 지구멀미 2009-08-27
» 밤이 오고 눈이 내렸다 지구멀미 2009-08-27
39 돌고래 지구멀미 2009-08-27
38 공덕동 로타리에서 걸어와 뜻없이 지구멀미 2009-08-27
37 고백하지 않았지만 너를 향한 분노는 지구멀미 2009-08-27
36 문 아래로 내려가 그 귤을 집어 지구멀미 2009-08-27
35 꽃잎 꽃에게서 떼어낼 때 지구멀미 2009-08-27
34 그때가 서른이다. 지구멀미 2009-08-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