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죄책감을 갖거나
귀중한 시간을 허비 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의 온전한 행위이며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내가 해질무렵 집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무엇인가를 쌓아올리고 쌓아올렸던 것들을 치장하고
허물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이것과 저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 방법을 배우고
인간사에 대하여 심사숙고 하였다고 하여서
그것이
양말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숨이나 고르게 내뱉고 있는 것보다 더 의미있지는 않다.

살아있다면 그 모든 행위는 동격이며
우주가 끝없이 흘려내려주는 저 불멸의 시간 앞에서
행위와 비행위는 곧 단일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한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가끔 방문을 열어두거나
서랍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내 입과 저 우주 사이에 악기를 두는 것.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했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할 것이다.

아직은 뺨이 저절로 뜨꺼워지는 나이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3 몇 줄 썼다가 지웁니다. 지구멀미 2009-08-27
32 조용히 멘델스존 지구멀미 2009-08-27
31 길이 아니라 입구 지구멀미 2009-08-27
30 그와 내가 왼쪽으로 지구멀미 2009-08-27
29 몸에 날개를 붙이며 내려와 지구멀미 2009-08-27
28 누워서 듣는다 지구멀미 2009-08-27
27 은행나무를 지나온 빗물이야 지구멀미 2009-08-27
26 내 이마는 아직 지구멀미 2009-08-27
25 다시 다문 입술 지구멀미 2009-08-27
24 펴면 잎, 쥐면 열매 지구멀미 2009-08-27
23 그것은 몸의 슬픔 지구멀미 2009-08-27
22 필요도 없는 규격봉투 지구멀미 2009-08-27
21 생은 소모성 질환 지구멀미 2009-08-27
20 다만 비가 그리워 수돗물을 지구멀미 2009-08-27
19 좀처럼 외롭고 크게 불러도 지구멀미 2009-08-27
18 주인 없는 몸 안에 손을 넣어본 적 지구멀미 2009-08-27
17 손톱보다 조금 컷다 던 지구멀미 2009-08-27
16 달을 보고 음력으로 지구멀미 2009-08-27
» 아직은 뺨이 저절로 뜨꺼워지는 나이 지구멀미 2009-08-27
14 약속도 없는데 기다려본 사람은 지구멀미 2009-08-27
13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화엄경 지구멀미 2009-08-27
12 상호 그런 것 지구멀미 2009-08-27
11 서른 뒤 이유 없는 지구멀미 2009-08-27
10 스타크래프트 지구멀미 2009-08-27
9 해줄 말 지구멀미 2009-08-27
8 짧은 순간 지구멀미 2009-08-27
7 밤에 은진에 갔다 지구멀미 2009-08-27
6 지구멀미 2009-08-27
5 만화 지구멀미 2009-08-27
4 삼손과 들릴라 지구멀미 2009-08-27
3 안개 지구멀미 2009-08-27
2 몽촌토성 지구멀미 2009-08-27
1 신도림 지구멀미 2009-08-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