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무덤은 다시 만삭이 되었다
지난 비에 씻겨 내려간 봉분 위로 붉은 흙을 가득 올려주고 돌아와
어린 아내의 잉태한 배를 베고 누운 저녁
늦은 밤에 달리는 산파처럼
마을을 가로 질러가는 바람은 자꾸만 할아버지 무덤 쪽으로 달리고
나는 오후에 마당으로 옮겨 심어 놓은
엉겅퀴 어린잎들을 걱정한다 한 번도 옮겨 심어본 적 없던 꽃이므로
새로운 흙 속에 심어 놓은 뿌리들이 썩지않고
지상 위로 건강한 잎과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그 핏빛 꽃으로 온통 붉어진 유월
마당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꽃과 내가 함께 흔들리다 문득
할아버지는 묻힌 게 아니라 다시 옮겨 심겨진 것이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런 사소한 상념으로 몸 뒤채일 때
아내는 아무런 감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으므로 내 머리를 잔잔히 쓰다듬고
그 손길에 가벼워져
내가 다시 아내의 둥근 배를 향해 돌아누우면
그때 아내의 만삭에서도 누군가 나를 향해 돌아눕는 이가 있으니
오래 전의 아버지도 이렇게 나를 향해 돌아누웠던 적이 있으리라
나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따라서 눕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향해 돌아눕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누군가를 향하여 돌아누웠던 적 있으리라
이 세상으로 건너오기 전에 문득 누군가와 마주쳤던 눈빛
그리하여 서로를 닮게 한 눈빛
아 오늘 저녁
할아버지의 무덤도 누군가를 향해 돌아눕고 있으리라
만삭이므로
누군가 할아버지의 무덤에 귀를 대고
다른 세상의 말 속삭여 주고 있으리라
무덤의 잔디 끝을 잔잔히 흔들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숨소리를
그러나 숨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리라
(199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