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명세서와 냉동밥

2009.09.29 11:38:25

 

아직 연인이었을 때 할부로 선물해 준 카드 값이 헤어진 후 뒤늦게 청구되어 그것을 보는 심정이 괴롭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돈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그 명세서가 잊었던 옛 기억을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한다. 흔한 이야기다. 


당신과 헤어지고 몇 번 울었을 뿐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우리의 인연이 거기까지였고 그 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기에 애쓰며 잘 견뎠다. 대체로 눈물은 가슴 근처에서 출렁일 뿐 얼굴까지 올라와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물론 버틸 수 없는 날들도 있었다.

사랑할 때 내가 이름을 대신하여 당신을 부르던 '부장님'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오직 나와 당신만 알고 부르던 애칭이었다. 그것을 꼭 한번만 이라도 더 불러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을 때 처음으로 울었다. 빈방에서 울며 혼자 그 애칭을 소리내 불렀다.

1200번 버스를 타고 당신 동네에 내려 서성이다 올려다 본 하늘에 달이 너무 아름다워 또 한번 울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던 골목이 빈채로 환했다. 그 골목을 보며 울었다.

 

그렇게 울었던 날도 있었지만 나는 대체로 잘 견뎠다.


일요일 오후였다. 그저 늦게 일어나 배가 고픈 평범한 일상의 순간이었다. 집에 뭐 먹을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뒤적이다 냉동실을 열게 되었다.

그곳에 적당한 분량으로 나누어 비닐 봉지에 포장된 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젠가 당신이 집에 와서 쌀 씻어 해두고 간 것이었다. 


"라면 같은 거 끓여 먹지 말아요, 귀찮은거 잘 알아요, 그럼 냉동고에 한끼 분량씩 얼려 둘테니 이걸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드세요"


잊고 있던 당신의 그 말과 표정도 온전히 다 생각났다. 전자레인지도 당신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날 그 언 밥을 꺼내 데워 먹으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내게 눈물이 이렇게 많았었나 놀라면서 울었다. 눈을 타고 내린 눈물이 입에 스며 밥이 썼다. 목이 메여 힘주어 넘겼다. 꺼이꺼이 소리 내 계속 울었다.

잘 견디고 있다 믿었던 것은 그저 내가 나를 속인 거짓말일 뿐이었다. 나는 그날 남김 없이 모두 무너져버렸다. 


할부 잔액처럼 당신이 내게 해주고 간 냉동밥은 아직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생과 그리움의 허기에 시달릴 때 구원처럼 내게 다시 청구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익혀 먹으며 또 울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살아 갈 것이다. 


당신이 내게 선물해 준 것들이 더 있다. 내가 알지 못할 뿐. 냉동고에 들어 있는 것들. 옷장을 열어보면 추워지기 시작할 때 입기 좋은 옷들. 서랍 속의 새 원고지. 내 가슴과 마음 곳곳에 당신이 선물로 넣어 준 그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생의 모퉁이에 무릎이 꺾여 아플 때 치유의 묘약으로 오게 될 것이다.


할부처럼 나뉘어서 오래 청구될, 당신의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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