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조금 지난 과거의 일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조금 전의 일들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 없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던 상황은 모두 기억하면서 두시간 전, 어머니를 병실에서 보고 온 것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막 병원에서 돌아와 때늦은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네 엄마 잘 있는지 궁금하다. 병 문안 가자"
"아버지, 조금 전에 저랑 같이 다녀오셨잖아요, 가서 엄마 이마도 쓸어주시고......기억 안 나세요?"

어머니가 없으면 이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아버지로 하여금 자꾸만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손톱같던 식사를 끝내고 연한 팔로 깍지 낀 채 쇼파에 앉아 말이 없으시다가 다시 내게 물으신다. 네 엄마, 잘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시켰다고 하지 말고 네가 전화 한번 해봐라.
 
박씨 집성촌에 홀로 흘러들어 온 뒤 가난했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의 남자들은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강해지고 독해져야 함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 희미한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께 듣던 당신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늘 싸움에 관한 일화들이 등장한다. 가난을 이겨내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당신들께서 박씨 가문들과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그 싸움은 때론 주먹다짐이었고 때로는 누가 더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힘겹게 일하는지에 대한 경쟁이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토론과 주장에서 의견의 굽힘없음 같은 종류이기도 했었다.

가난했던 아버지. 그러나 그 가난때문에 무시당하고 싶지 않으셨던 젊은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의 그 어떤 언쟁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분이셨다. 명확한 기억력과 논리를 바탕으로 마을 어른들의 주장을 하나씩 굽혀나가시곤 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소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어려워하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 가난을 위안 받았는지도 모른다. 돈은 없지만 쉬운 집안이 아니다. 내 아들과 딸은 쉬운 집안, 호락호락한 집의 아들 딸들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독하게 일하셨다. 부러지기 직전의 강도로 일하셨다고 해야할까. 그 마른 체구로 체중의 몇배가 되는 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옮기셨고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쉼 없이 일하셨다. 해마다 마을의 노는 땅을 얻어 씨앗들을 뿌렸고 가을엔 사람들의 도움없이 혼자 그 많은 수확을 다 끝내곤 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이제 아버지는 재산으로 따지면 몇번 째 순위 안에 들게 되었다. 가끔 이야기 하신다. 아들아. 그래도 내가 동네에서는 무시 당하고 살진 않았다.  아들아. 그래도 내가 먹고 죽을 만큼은 벌어 놓았다.

사실 젊은 시절 아버지께서 발현할 수 있었던 모든 강직함의 근원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부드러운 내조가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젊어서는 그것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 당신이 한 게 무엇있소. 그러한 표현으로 어머니를 울리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날의 아버지였을 뿐. 이제 늙어 몸과 마음이 점점 기울어갈 때 투항하듯 고백처럼 아버지는 어머니를 한없이 인정하던 참이었다. 

"네 엄마가 없었다면..."

아버지의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진 이후부터 부쩍 나를 불러 앉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것을 곁에서 듣던 어머니는 싫지 않은 듯 웃으시며 말씀하곤 했었다. 

"이 양반이 늙어서야 드디어 철 드나. 오래 살고 볼 일"

그러니까 아버지는 나를 매개로 하여 어머니께 고백을 하셨던 셈이다.  결국 곁에 있고 서로 기대어줄 사람은 당신과 나 밖에 없다는 것. 젊은 시절 당신이 그러해 준 것처럼 늙은 내게도 끝까지 힘이 되어 달라는 부탁들.

그러나 그렇게 구원과 같은 어머니께서 병으로 쓰러져 누었다고 할 때 느끼는 아버지의 불안은 어쩔 것인가. 
별일 아니예요. 며칠 좀 쉬시고 약드시면 일어나실 수 있대요, 그렇게 몇번이고 말씀드려도 아버지는 믿지 못하시고 눈이 자주 젖곤 하셨다. 

내가 시켰다고 하지 말고 네가 전화 한번 해봐라 하고는 통화를 하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귀로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신다. 
아버지, 엄마 바꿔드릴까요? 물으면, 아니다, 됐다, 말씀하시며 저만큼 되돌아가 앉으신다.
그래도 다시 한번 통화를 권할 때, 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얼굴 빛이 환해져서 다가오신다.

"점심은 먹었는가? 당신 걱정하는게 아니라 그냥 궁금한거야 성규도 와 있고 하니까 그냥" 

아버지는 몇시간 뒤 다시 내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 엄마에게 전화 한번 해보자. 내가 시켰다고 하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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