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나는 울 것

2009.08.27 16:18:12

간혹 그와 마주친다. 오늘은 외근에서 돌아오던 한적한 엘리베이터에서 였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그에게서 풍겼다. 그를 만나면 무언가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어야 한다. 마침 엘리베이터의 LCD패널에서 증권정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미국 주식 많이 떨어졌네요. 맨날 널뛰기..."
그와 나는 간단히 주식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눌 소재가 있다는게 고마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인가 일상적인 이야기, 그런 것들을 찾아내 그와 얘기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와 나는 동행하여 사무실로 들어간 뒤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들처럼 사무실에선 서로 아는 채를 하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마주치면 엷은 목례만 건넬 뿐이다.

그는 얼마전 까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인해 어느날 갑자기 업무를 놓게 된 것이다. 대기발령은 죽음처럼 예고없이 그에게 찾아왔다. 팀장과 면담을 하고 돌아온 뒤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애쓰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간단한 짐만 챙겨 사무실 가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배된 것이다.

처음 며칠은 그의 분노에 함께 동조하기도 했다. 이 구조적인 모순과 어쩔 수 없는 것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 회사에 대한 분노와 일말의 희망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마음에서 출발했고 마음까지 닿을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랬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줄게되었다. 그가 사무실 구석자리에서 비석처럼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주친다 해도 길게 이야기 나눌 수는 없었다. 대화가 점점 상황의 중심에 닿지 못하고 피상 쪽에서만 맴돌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여러가지로 힘들지요? 조금만 더 견뎌보세요" 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 다 그런거지요" 라고 그가 애써 대답할 것을 알기에 그 쓸쓸한 문답을 꺼낼 수가 없는 것이 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구내식당에서 합석하게 되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 해야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를 자연스럽게 함으로써 -저는 이 상황, 당신이 처한 상황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요, 라고 보여줘야만 했다. 

침묵이 견딜 수 없고 침묵이 슬퍼서 이야기를 해야하는 상황은 쓸쓸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무슨 말인가를 꺼낼 때,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서로 잠시 견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때로 날씨, 주식, 옷차림 등을 이야기 했지만 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 대화가 목적이 아닌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관도 없는 주제의 이야기들을 꺼내면 그도 그것에 맞춰 답을 한다. 가끔 웃고 끄덕이다 사무실에 들어와 목례한 뒤, 낯선 타인처럼 외면하면서 자리로 돌아가서 앉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일상이 분주한 듯 서류들을 꺼내 책상위에 펼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상황을 맞게 된다. 그에게 지금 온 상황을 어느날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며칠간 분노하다가 결국 유령처럼, 없는 존재로 남아 사무실에 말없이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복도와 식당에서 동료들과 만나면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다가 결국 지쳐 회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더 좋은 곳을 찾았어요. 삶의 새로운 계기가 될거예요, 말하겠지만 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속에 숨겨져 있는 비애와 쓸쓸함을 사람들을 읽어낼 것이다.
 
모든 희망속엔 불안이 내재하지만 마찬가지로 불안 속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상황이와도 견딜 수 있다. 그도 견딜 것이고 나도 견딜 것이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와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서로 아무렇지도 않으려 애쓸 때, 그 짧은 쓸쓸함은 견디기 쉽지 않다. 큰 것들은 잘 견뎌낼 수 있지만 작은 것들 앞에 우리는 무너진다.

월요일이면 다시 그를 볼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일상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을 것이다. 삶이라는 무대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어느 순간 연극은 끝나고 탈의실로 되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며 거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실컷 본연의 모습이 되어 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대 위에서 울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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