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경의 낭비' 또는 '첩경을 찾는 낭비'라는 옛 표현이 있다
첩경은 지름길을 뜻하는 한자어이고 낭비는 그 뜻 그대로 '무엇인가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쓴다' 는 것이니
첩경의 낭비는 '지름길로 가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눈 앞에 있는 곧은 길을 두고 지름길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의미이다.
첩경을 찾으려고 낭비하는 시간에 차라리 자신에게 주어진 곧은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목표에 빠르게 가서 닿는 방법임을 격언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싯구 중에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같은 뜻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인생에서 꼭 새겨둬야 할 말이다.
위의 격언에서 '첩경'이라는 말만 떼어낸다면, 나는 저 낭비라는 표현이 한없이 좋다.
오히려 인생의 본질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쓰는 그 시간들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일하고 돈을 벌고 경쟁하는 시간들이 아니라 걷고, 앉고, 자전거로 평지를 달려나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잡담을 나누는 그것.
일요일 아침의 늦잠. 어느날의 도보여행.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손틈으로 달아나버린 그 몇 분.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낭비의 시간들을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질주하고 경쟁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그 쉼과 낭비가 목적이 아니라면 이 생에서 우리의 경쟁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러나 질주와 경쟁은 그 자체로 쾌락과 닿아 있어서 방심하면 우리가 쉽게 그것의 종으로 결박 당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엇인가를 껴안으려고 길을 달려가는 것인데 그렇게 먼 길을 달리는 동안 달리는 것 자체에 쾌감을 느껴 정작 껴안으려던 대상은 그대로 지나쳐버린다는 것.
"왜 달려가고 있는지 묻지 말아주세요. 사실 저도 그것은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멈추면 안될 것 같은 이유 없는 불안감이 가득해요"
그렇게 인생을 경쟁과 질주에 헌신하다 문득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지나간 날들을 되짚으며 무엇을 느끼게 될까.
물론 쉴틈도 없이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자기 만족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신께서 '너에게 1년을 더 주겠다' 하면 그 1년을 어디에 쓸 것인가 생각해본다.
못다 이룬 경쟁과 목표를 향해 다시 한치의 쉼과 낭비도 없이 달려 갈 것인가.
나는 그 1년을 온전히 낭비할 것이다.
얼굴이 희고 눈이 아름다웠던 서대문의 그 여인.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함께 걸었던 그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면서 며칠.
시집 몇 권. 그대와 읽던 로르카. 손톱에 봉숭아물. 아침 열시까지의 늦잠과 오후 세시의 점심. 간디와 문익환과 노무현 평전. 사랑하는 그대와 자전거 여행. 여름 소나기 아래 맨발. 꽃 아래 두시간. 붐비는 지하철에 목적없는 승차. 토요일 오후의 드라마 재방송.
나는 그렇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1년을 보낼 것이다. 인생의 참 맛은 낭비에 있어, 우리는 달리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달린 뒤 쉬려고 온 것, 온전히 다 쓰려고 이 세상에 온 것, 나는 그렇게 내 자신에게 속삭여줄 것이다.
문제는 그 마지막 1년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년은 커녕 오늘이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고 1년 밖에 안 남았다 생각하여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하였는데 그뒤로 계속 이어지는 생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것이 문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을 짐작할 수 없다면 하루에 몇시간, 일주일의 하루, 1년의 며칠을 우선 온전히 낭비해 보자는 것이다. 함부로 써보자는 것. 지금 컴퓨터를 끄고 나가서 저 가로등 아래 서 있어보는 일. 흔들리는 잎이 몇개인지 세어보다가 자기 자신이 그 순간 그 잎과 하나가 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목적 없이 걷다가 두시간. 손으로 쓰는 편지. 저절로 깨어날 때까지 잠들어 있기. 1호선 첫 역에서 끝 역까지의 독서.
그렇게 생의 마디마디를 능동적으로 낭비하는 것이다. 대나무가 곧게 높이 오를 수 있는 것은 중간에 낭비의 마디가 있어서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첩경의 낭비라는 옛말을 나는 이렇게 다시 해석하고 싶다. 낭비 없이 빠른 길로 달려가기만 하는 삶, 속도와 지름길 위, 그 경쟁과 질주가 오히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리게, 쉬면서, 앉아 꽃 구경 하면서, 서로 손 잡고 천천히, 다시 천천히.
생의 진정한 의미는 질주가 아니라 낭비 쪽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 지내시지요? 서울에 가끔 올 계획이라 했었는데. 그러시는 지 궁금해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맛 없는 커피집을 제가 많이 알고 있거든요. 마시면서, 커피 집 흉 봐요.
......
뼈 아프게 후회하는 것도 삶의 깊은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저는 때로 뼈가 아프고 싶어서 울때도 있거든요.
그러나 조금씩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