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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20:16 2008/10/27 20:16

언젠가 부터 그는 현관 옆 공터에 자주 서 있었다
사무실이 답답하여 머리를 식힐 겸 그곳에 내려가면 혼자 조용히 서 있던 그가 나를 보며 얼굴 환히 웃어주곤 했다
그것은 몇번의 안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내게 건네던 호의였다
아, 별일 없으시죠. 일은 잘 되시나요. 날씨가 참 좋아요.
우리는 그저 그런 일상의 이야기들을 묻고 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나누는 그 짧은 대화는 서류와 실적과 많은 수치들 속에서 끓어오른 머리의 열기를 식혀주기에 좋은 쉼표였다.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후에 들었다.
신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급한 병으로 아내를 허망히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못견뎌 한다는 말도 들었다.
날짜를 짚어보니 혼자 서 있던 그가 내게 환히 웃어주던 날들도 아내를 잃고 난 뒤였다. 그는 못견뎌서 거기 혼자 서 있다가 내게 애써 웃어주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이상 그 공터에 갈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거기 고통 속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는 환히 웃어줄 것인데 그 웃음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으로 답할 자신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생의 순간들 마다 슬픔을 숨기는 내 연기는 늘 서툴렀다. 아픔과 괴로움 앞에서 내 얼굴은 쉽게 붉어지고 붉어진 얼굴 속에 생겨나는 웃음도 반이 슬픔이었다. 누구나 그걸 쉽게 알아챘다.

슬픔을 알고 있는 내가 그 앞에 서면 어쩔 것인가. 얼굴은 붉어질 것이며 애써 꺼낸  웃음 속에도 슬픔이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걸 못 읽은 듯 애써 태연해야 할 것인데 그 미숙한 서로의 연극을 나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지 못했다.
혹시 그를 만나 그 웃음 앞에 서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죄인인 듯 먼 문으로 돌아 사무실로 오르곤 했다.
가끔 멀리서 혼자 서 있는 그가 보이면 잘 견뎌라. 진심으로 그렇게 몇번 빌어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그를 잊고 지냈다.

오늘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괴로움 때문에 몸을 돌보지 못한 그가 급성간염으로 입원했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떠난 것.

그의 환했던 웃음이 선명히 떠올랐다.
고통이 그의 전체이었으면서도 내게 웃어준 것.

마음이 한없이 쓸쓸해져서 그가 서 있곤 하던 공터로 오랜만에 내려가봤다.
그는 거기 없고 내게 오던 그의 웃음도 없었다.
물기 묻은 바람이 가을의 잎을 처연히 흔들고 있을 뿐.

그의 웃음은 무엇이었을까, 생이란 또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가 앞에 있다는 듯 인사 건네며 한번 웃어보았다
아, 별일 없으시죠. 일은 잘 되시나요. 날씨가 참 좋아요.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주던 그에 대한 늦은 대답이었다.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자문이며 자답이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내 얼굴은 붉고 웃음의 절반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2008/10/20 21:43 2008/10/2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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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산호 해수욕장]
 
감탄하면서 한걸음에 다가갔지만
더는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 경계 앞에서 머뭇거렸다

몇걸음 앞 빛나는 물이 밟기 죄송스럽게 아름다웠던 것

심약한 내겐
그 원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고
그러나 저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쉽게 외면하는 것 또한 고통이어서
나도 그 경계에서 흔들리며 오래 머뭇거렸다

믿지 않겠지만 8월의 우도
그도 내 등 뒤에서 나처럼 머뭇거렸다

나를 밀어
되돌아 나오지 못할 저의 심연 속에 가두려던 계획 앞에서
여러번 망설이다 결정하지 못하고 손을 등 뒤로 거둔 것

믿지 않겠지만 8월의 그 우도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서로에게 위태로웠던 그 순간
2008/10/05 12:19 2008/10/05 12: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입던 옷을 누군가에게 며칠 빌려준 뒤
받아보면
이상하게 크기와 형태가 달라져있다
입어보면 내 옷 같지가 않다
그건
빌려갔던 사람이 나보다 더 뚱뚱해서가 아니다

구두도 마찬가지
오랫동안 신지 않던 구두를 다시 신었을 때
발끝에 와닿는 휑한 느낌을 아는가

떨어진 낙엽들을 주머니에 넣었는데
잊고
세탁기에 옷을 넣었던 것이다

작게 흩어진 잎 조각들이 속옷에 가득 묻어있다
그냥 입고 길을 나선다

이것은 내 옷이다
내 옷은 내게 오래 닿아 있었던 것
오래 닿아 있을 때
정령은 비로소 경계를 풀고 서로에게 건너가 조금씩 섞인다
그리하여 옷은 나를 닮은 것
정령의 문양대로 형태가 순응한 것이다

그 시절
당신이 내게 닿아 나를 닮고
내가 당신을 닿아 얼굴이 부드러워진 그 이유처럼


그러나 오늘은
속살이 잎 조각에 쓸려 까끌하다


(2006에 처음쓰고 2008년에 수정함)
2008/08/10 20:07 2008/08/10 20:07

아버지의 라이카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도 종이었다.
고약하기로 소문난 주인댁에서 돌아와 어린 아들 곁에 앉을 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이,
다만 아버지의 소원이셨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모두들 기념사진 촬영에 바쁠 때 카메라가 없던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난감해하셨다.
아들의 졸업은 오래 기념해주고 싶으셨던 것.
이웃에 몇번 부탁하여 사진을 한장 찍어달라고 하셨다.
가슴팍에 들고 찍을 꽃도 빌리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등학교 졸업사진>

지금도 앨범을 찾아보면 그때의 사진이 있다. 어색한 표정으로 그곳에 나는 서 있고 자세히 보면 내 시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그 옆에 죄송한 듯 서 있는 내 아버지를 향해 있다.

작은 아버지를 월남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논을 팔아 돈을 주셨다.
그곳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던 어린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 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어떤 세월과 치환되어 생겨난 것인지 울며 떼쓰던 동생은 알지 못했다.

군대에 가지 않게 된 작은 아버지는 뒷돈 쓰고 남은 돈으로 카메라를 하나 사셨다고 한다.
그때 땀흘려 일하시는 아버지를 찍은 사진이 아직 몇장 있다.
사진 속 아버지의 표정에 웃음이 있다.
그러나 그건 슬픔의 맨살 위에 겹쳐 입은 웃음이라는 외투,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볼 때
착시처럼 거기 슬픔의 문양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친구의 엄마를 보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아니, 세상엔 피아노를 치는 엄마도 있구나.

어머니는 학교에서 조금 비켜선 시장 골목에서 옥수수와 나물을 파셨다.
나는 그것이, 그 가난의 자백이 너무 창피했으므로
수업이 끝나면 그 골목에서 가장 먼길을 택해 집으로 가곤 했었다.
굳이 시장쪽으로 가자고 하는 친구들을 먼저 보낸 뒤 멀리서 어머니의 등을 보다가 돌아 온 저녁.
그것 팔아서 몇푼이나 버느냐 소리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지금도 가끔 그 외침이 다시 내게 돌아와서 나를 찌른다.
어린 아들의 철없는 외침을 잔잔한 어깨로 듣고 계시던 어머니의 눈빛도 자꾸 되돌아 온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되돌아 온 내 자신의 목소리에 몰매 맞는다.
그건 이제 때리면서, 나를 살리는 매다.


가끔 장롱에서 아버지가 쓰던 카메라가 나왔다는 말을 듣는다.
내 아버지께서도 취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일이 없을 때 카메라를 들고 산과 들을 다니며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땐 가족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때였다.

아무리 장롱을 뒤져도 뻔하다. 그곳엔 묵은 이불 뿐이다.
한낮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피곤하여 덮고 잠들던 그 이불 뿐이다.
아버지의 마르고 뾰족한 몸과 오래 닿아서 닳은 그 이불.
아무것도 없는 그곳.
그러나 마음의 팔을 뻗어 뒤적일 때 거기 손끝에 아리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버지는 장롱 속에 라이카 대신 땀흘린 청춘을 넣어두신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야위고 주름진 뺨과
쌀을 씻지 못하던 저녁, 부억에서 울던 어머니의 흐느낌과
굳은 살과 풀물로 가득한 잉여없던 청춘의 긴 세월을 거기 모두 넣어 두신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라이카 대신 아버지의 청춘을 꺼낸다. 거기 名器처럼 빛나는, 세월이 지날 수록 그 가치가 더해지는 아버지의 청춘이 있다.
손으로 만지면 체온이고 눈으로 바라보면 빛이고 가슴에 대어보면 쿵쾅거리는 아버지의 긴 청춘이 거기 있다.
나는 가만히 그것에게 마음의 무게를 기대어본다.
내 마음은 귀한 것과 만나 부드러워지고 그러나 어느 한 쪽은 움켜쥔 듯 아리고 슬프게 주름진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장롱 속에 무언가를 넣어 둘 때다.
아버지는 어느 날 묵은 이불을 꺼내시다가 어린 자식이 넣어 둔 그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걸 보시고 다소 놀라 웃으시다가 가난해서 더 길었던 당신의 청춘이 마음을 눌러 눈이 젖으시고
가난했으나 얻은 것들이 더 많았구나, 내 청춘의 빛은 오랜 뒤에 비로소 켜지는 불빛같구나, 그런 마음으로 다시 눈이 젖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때이다.
아버지의 장롱 속에 내가 무언가를 넣어둘 때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어리고 어리석은 나는 알지 못한다.


(2003년에 처음쓰고 2008년에 수정함)

2008/07/02 19:43 2008/07/0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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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아-, 발음하고
윗입술과 아랫 입술이 다시 서로에게 천천히 가 닿는 것처럼
유월의 저녁이 온다

그것은 누운 채로 온다
누워서 포개지는 입술처럼
빛과 어둠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

보는 내가 부끄럽게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지금은 저녁 일곱 시 십 칠분

마른 내게 네 환영이 스미어
내가 젖고 물렁해지는 시간
2008/06/11 23:37 2008/06/11 23:37

네 이마가 짜다
짜서 좋다
그건 너도 나를 만나려고 생을 온통 뛰어 왔다는 증거
늦지 않아야 한다
이번 생엔 닿아야 한다
생이 때리면
이 꼭 물고 맞으며 너도 뛰어 온 것
울고 웃으며 쉼 없이 온 것

네 이마가 짜다
오늘 내 입술은 물고기처럼 거기 오래 머문다
수고했다고
땀흘리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였다고 
그대 내면에 건네고 싶은 말

아픈 자의 이마에 손 얹듯
수화처럼 그대 이마 위에 내 입술을 둔다

네 이마가 짜다
짜서 고맙다

2008/05/18 13:48 2008/05/18 13:48

은진에서 돌아와 취한 채로 그는 전화를 해왔다
머리가 큰 미륵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디에 가셨다구요?
그는 절 이름도 몰랐다.
관촉사와 은진미륵이라는 말은,
그에게 내가 설명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을 가려고 건너간 벌판이 그 유명한 황산벌입니다.
계백이 오천을 이끌고......

내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기분이 들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좋으세요?

왠걸, 가보니 단풍이 아주 잘 들었더라고, 흙도 붉고 부드럽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 아주 좋아.

그가 왜 사람들 사이에서 [거사]로 불리는지 어렴풋 알수 있었다.

(2001년)

2008/05/08 02:03 2008/05/08 02:03

이제 막 글씨를 배운 듯
아이 하나가 길에 나와 펼친 공책에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쓰는 획
방해 되지 않게 뒤에서 한 컷 담는다
아이가 뒤돌아 본다
웃는다
나도 웃는다

(나는 아이의 맑은 웃음을 보고서 웃었지만, 아이는 무엇을 보고 먼저 웃어 준 것일까, 꽃들이 늘 손해보며 저의 얼굴 꽃으로 접어 세상에 내어놓는 것처럼, 저 아이의 웃음, 그런 것일까)

아이는 다시 고개돌려 다 쓰지 못한 이름의 끝자를 쓴다
다가가서 보니
김석중,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일 것

내가 발음해본다. 김석중

맑은 빛 쏟아진다

(2002년)

2008/05/07 16:49 2008/05/07 16:49

온전히 봄인 토요일 아침 열 시
창문만 열어도
저기 쏟아지는 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심호흡하다가
방을 닦고
진공관 라디오를 켜고 앉았다가

계획하거나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거나 하지 않고
목적도 없이 그냥 저 밖에 나가
봄에 젖어 부푼 나무들과 함께 말 없이 서 있는 다는 것

하고 싶은 일도 만들지 않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오, 라고 말하지도 않고
내일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란 실천없는 막연한 바램도 없이

그냥 내가 [봄]이 되어 본다는 것
내가 그냥 [봄 오후 두시]가 되어 본다는 것

손으로 만져보면 지상은 따뜻하고
햇볕 받은 내 몸도 따뜻해  
이 안에 분명 꿈틀거리는 식물들이 있을게야
곧 잎을 펴려고,
펴기 전에 쥔 주먹같은

조금 전에 내 이마를 스치고 간 바람 속에는
먼 곳에서 오는 편지도 담겨있을 거야, 밤엔 별이 맑고
오후의 구름은 그 모양이 유난히 둥글어

내 몫은 그냥 서 있는 것 그냥 받아 들이는 것
젖었는지도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이미 속옷까지 축축해져 있는 것

이 봄에 그러하는 것

(2001)

2008/05/07 16:45 2008/05/07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