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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모두들 기념사진 촬영에 바쁠 때 카메라가 없던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난감해하셨다.
아들의 졸업은 오래 기념해주고 싶으셨던 것.
이웃에 몇번 부탁하여 사진을 한장 찍어달라고 하셨다.
가슴팍에 들고 찍을 꽃도 빌리셨다.

네 이마가 짜다
짜서 좋다
그건 너도 나를 만나려고 생을 온통 뛰어 왔다는 증거
늦지 않아야 한다
이번 생엔 닿아야 한다
생이 때리면
이 꼭 물고 맞으며 너도 뛰어 온 것
울고 웃으며 쉼 없이 온 것
네 이마가 짜다
오늘 내 입술은 물고기처럼 거기 오래 머문다
수고했다고
땀흘리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였다고
그대 내면에 건네고 싶은 말
아픈 자의 이마에 손 얹듯
수화처럼 그대 이마 위에 내 입술을 둔다
네 이마가 짜다
짜서 고맙다
은진에서 돌아와 취한 채로 그는 전화를 해왔다
머리가 큰 미륵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디에 가셨다구요?
그는 절 이름도 몰랐다.
관촉사와 은진미륵이라는 말은,
그에게 내가 설명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을 가려고 건너간 벌판이 그 유명한 황산벌입니다.
계백이 오천을 이끌고......
내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기분이 들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좋으세요?
왠걸, 가보니 단풍이 아주 잘 들었더라고, 흙도 붉고 부드럽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 아주 좋아.
그가 왜 사람들 사이에서 [거사]로 불리는지 어렴풋 알수 있었다.
(2001년)
이제 막 글씨를 배운 듯
아이 하나가 길에 나와 펼친 공책에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쓰는 획
방해 되지 않게 뒤에서 한 컷 담는다
아이가 뒤돌아 본다
웃는다
나도 웃는다
(나는 아이의 맑은 웃음을 보고서 웃었지만, 아이는 무엇을 보고 먼저 웃어 준 것일까, 꽃들이 늘 손해보며 저의 얼굴 꽃으로 접어 세상에 내어놓는 것처럼, 저 아이의 웃음, 그런 것일까)
아이는 다시 고개돌려 다 쓰지 못한 이름의 끝자를 쓴다
다가가서 보니
김석중,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일 것
내가 발음해본다. 김석중
맑은 빛 쏟아진다
(2002년)
온전히 봄인 토요일 아침 열 시
창문만 열어도
저기 쏟아지는 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심호흡하다가
방을 닦고
진공관 라디오를 켜고 앉았다가
계획하거나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거나 하지 않고
목적도 없이 그냥 저 밖에 나가
봄에 젖어 부푼 나무들과 함께 말 없이 서 있는 다는 것
하고 싶은 일도 만들지 않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오, 라고 말하지도 않고
내일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란 실천없는 막연한 바램도 없이
그냥 내가 [봄]이 되어 본다는 것
내가 그냥 [봄 오후 두시]가 되어 본다는 것
손으로 만져보면 지상은 따뜻하고
햇볕 받은 내 몸도 따뜻해
이 안에 분명 꿈틀거리는 식물들이 있을게야
곧 잎을 펴려고,
펴기 전에 쥔 주먹같은
조금 전에 내 이마를 스치고 간 바람 속에는
먼 곳에서 오는 편지도 담겨있을 거야, 밤엔 별이 맑고
오후의 구름은 그 모양이 유난히 둥글어
내 몫은 그냥 서 있는 것 그냥 받아 들이는 것
젖었는지도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이미 속옷까지 축축해져 있는 것
이 봄에 그러하는 것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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